나온 지 꽤 된 책인데 송길영의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이제야 읽었다. 단순한 기술 예측이나 조직 트렌드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 '핵개인'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일, 조직, 기술, 역할,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시야를 새롭게 정리해주는 책이다. 나는 특히 제 2장 <코파일럿은 퇴근하지 않는다>를 인상 깊게 봤다. 밑줄 대부분이 이 파트에 그어졌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핵개인은 단순히 혼자서 일할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완성도 높은 기능 단위이자 연결자로 작동하는 존재다.
참고로 이번엔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문장을 따로 타이핑하지 않았다. 밑줄만 그어두었다가 GPT에게 읽어주었는데 매우 정확하게 받아 적어줘서 꽤 놀랐다. 인식 기술이 이 정도까지 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1. 핵개인은 혼자이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
책에서 말하는 '핵개인'은 조직에서 떨어져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실행하며 외부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존재다.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위계 없이도 스스로 일의 흐름을 설계하고 움직이는 사람. 핵개인은 단순한 구성원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운용되는 인터페이스에 가깝다.
"중앙에서 관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급속히 낡은 패러다임이 될 것입니다. 이전 방식으로 중앙화된 조직에서 기존의 규칙을 고집하면 미래에 대한 예측과 반응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보면 환경 변화를 인지하고, 해결책을 내고, 적응하는 세 단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각자 완성된 지능을 갖춘 핵개인들이 분산된 권력의 형태로 세포처럼 퍼져있기에 매번 몰아치는 변화의 파도에 더 빨리 올라타고 더 최적화된 해결책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p.133)
"젊은 구성원들, 지금 시대의 핵개인들은 효율을 전제로 하지 않는 명목상의 권위를 권위적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권위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권위인지 분별하고 싶어합니다. 현상 유지를 원하는 권위적인 상사인가, 전문성과 포용력을 갖춘 현명한 권위자인가? 계속 묻습니다."(p.135)
"팀장님이 코파일럿과의 협력에 익숙해지면 다른 매니저들의 업무가 하나씩 줄어들고, 결국 혼자 일하는 구조로 정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코파일럿은 승진을 요구하지도 않고, 급여 인상이나 보너스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회식도 점심시간도 필요없고 노조에 가입하지도 않습니다."(p.94)
"자동화는 결국 각자 혼자서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 다시 말해 AI 디렉터로서 인간의 진화를 추동합니다. AI와 합을 맞춘 완전체 개인과 조직은 이후 어떤 관계를 형성하게 될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p.94)
2. 일의 본질은 생산이 아니라 제거로 이동하고 있다
이 책은 앞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의 기준이 달라질 거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많이 하는 사람'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불필요한 일을 '없애는 사람'이 중요한 시대가 온다.자동화는 반복과 숙련을 기술에 넘기고, 인간은 무엇을 제거하고 어떻게 구조를 재설계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일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일은 더 본질적인 일이다.
"앞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하거나 숙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없애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이 일을 없애는 것이라면 그 사람 본인은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모순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 이 경우 일 잘하는 사람이라면 해당 조직에서 모든 일을 마친 후 그 경험을 발판으로 다른 조직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쪽에 가깝습니다. 일을 없애는 매니저가 직무를 성취해서 안정화를 이룬 다음에도 조직은 더 큰 부가가치로 이전하는 새로운 꿈을 현실화시키고자 시도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새롭게 개선하고 도전해야 할 일은 끊이지 않습니다."(p.145)
"조직이 외부와의 경쟁에 놓인 상황이라면 혁신은 일상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렇다면 일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는 숙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과업은 지금의 일을 지켜내는 데에 있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판으로 파괴적 혁신을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것입니다."(p.146)
3. AI는 보조자가 아닌 설계의 조건이다
AI는 그냥 보조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 방식과 협업 구조를 전제로 설계해야 하는 대상이다. GPT, 코파일럿, 플러그인 같은 도구들은 그 자체로 뛰어난 '작업 파트너'지만 사람이 무엇을 시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기술을 '쓸 줄 아는가'보다 어떤 흐름에 기술을 적용할지, 기술과 함께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생성형 AI와의 협업은 인간 능력의 순위를 계속 재조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뛰어난 능력이라고 평가받던 것들의 중요성이 줄고 하찮게 여겨지던 행동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묵묵한 인내와 지구력보다 없던 개념을 생각해내는 엉뚱함이 주목받는 시기입니다.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아 그때그때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이 더 높은 생산성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p.126)
"단순한 근면함과 순응성은 이제 진화 과정에서 덜 중요해집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도 불필요합니다. 답이 있는 문제는 AI가 풀 것이고, 인간은 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역할로 분업이 이루어질 터이기 때문입니다. 창의적인 사람에게 AI 기반 환경은 자본의 한계에 발목 잡히지 않고 비상할 수 있는 활주로입니다."(p.128)
4. 연결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저자는 이제 '지능화보다 연결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개별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시스템 안에 있고, 그 시스템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다. 예전처럼 조직 내부에서만 역할을 나누는 방식으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제는 느슨하지만 빠르게 반응하는 연결 구조가 더 생존에 유리하다. 핵개인은 혼자 움직이되 연결을 전제로 한다. 외부와 열려 있으며 필요한 순간 빠르게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개미의 무리처럼 각자의 모듈을 연결해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서 하나의 완성된 서비스를 위해 모든 것을 개발할 필요가 없는 세상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협업의 대상과 주체가 같은 조직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의 크기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포인트는 지능화보다는 연결성입니다."(p.129)
5. 직업은 정체성이 아니라 질문의 형태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핵개인의 커리어는 정해진 직무명이나 포지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던지고 싶은 질문, 해결하고 싶은 문제의 흐름을 지니는 것이 곧 경력이고 정체성이다. 질문이 없으면 도구는 흩어지고 기술은 의미를 잃는다. 하지만 질문이 있는 사람은 기술을 엮고 시스템을 설계하고, 결국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언어 습관이 조직의 운명을 바꾼다. 언어에는 바뀐 세계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p.78)
"많은 사람들이 AI의 도래로 없어질 직업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며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앞으로도 새로운 직업이 무수히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업의 생멸 속도가 가파른 현대에는 지금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것보다 현재의 경험과 이력을 쌓으면서 미래의 선택을 준비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때 각자 취해야 할 자세는 새로운 기술과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p.147)
"매니징의 전문성에 대한 논의가 중요해집니다. 낭비 없는 촘촘한 조직일수록 구성원들이 일을 시작할 때와 진행할 때 필터링과 피드백을 매우 정교하게 합니다. 변화한 환경에서 세상의 복잡성을 빠르게 이해하고 일의 전체 맥락을 모두 검토해야만 일의 혁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질문해서 핵심을 추출해내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이 현상에서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그 현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당장 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핵심을 추출하고 시선을 재조정해주는 고도의 필터링 지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이 바로 지금 시점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리더의 역할입니다. 이제 작업 프로세스에 참여하지 않고, 작업 분배와 공정 점검, 결과에 취한만 맞는 전업 관리 모델은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업 공정인 시스템에 의해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보일수록 무임 승차자와 군림하는 사람은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리더에게는 더 깊은 통찰력과 더 높은 전문가적 자세가 요구됩니다. 핵 개인들이 함께 일하는 동료의 전문성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울수록 훈수만 두고 결과물만 취하려는 구성원이나 20년 차 나이태를 관료의 증거로 들이대는 관리자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p.173)
"결과가 더 잘 생성되는 언어로 움직이다 보면 결국 세계 최고의 강력한 프로그래밍 언어는 영어가 될 것이라는 말이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모국어를 극단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유리해진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개념 표현을 가장 논리적으로 깊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번역 소프트웨어의 도움으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어떤 경우든 직관적인 착상을 논리적인 전개로 세밀하게 표현하는 역량, 즉 언어 능력이 인간이 아닌 지능 개체와 협업하는 데 소중한 자질이 된다는 것입니다."(p.124)
마무리하며
핵개인은 조직을 무시하거나 해체하려는 개인이 아니다. 그는 지시 없이도 움직일 수 있지만 연결을 전제로 하여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주체이다.
여러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까지는 조직 안에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일하는 게 재밌는데. 내가 더 경력을 쌓고 리드하는 입장이 되면 그땐 어떤 환경이 되어있을까. 어떤 애티튜드로 일해야할까.
효율을 추구하는 성향이 어쩌면 누군가의 역할을 없애는 방향으로 이어지진 않을까 망설인 적이 있다. 반복적인 작업이나 오래된 방식을 비효율적이라 느끼면서도 그걸 정리하거나 없애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자리를 잃는 일처럼 느껴질까 봐 조심스러웠다. 타성에 젖은 채 행해지던,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흐름을 멈추자고 말하는 일. 낡은 구조를 바꾸자고 제안하는 일에 죄책감 같은 게 따라붙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그건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태도보다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역할을 다시 정의하고 새로운 흐름을 설계하는 일에 가까운듯하다. 동시에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연결을 잃지 않고,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그 맥락까지 함께 책임지는 태도. 이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다음 흐름을 우리는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